고산은 국문학사상 단가의 일인자로 군림하게 되었고 그의 작품 <산중신곡>은 물론 이 <어부사시사>는 최고의 금자탑으로 뽑힌다는 결론을 내린 바 있다.
≪ … 중 략 … ≫
Ⅱ. 고산윤선도의 생애
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작가, 본관은 해남(
고산윤선도의 시조는 기교면에서 탁월하고, 특히 <어부사시사>는 시적 구성이 유기적으로 구조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그의 시는 즉흥이라기보다는 주로 작흥에 의한 제작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아울러 그의 시조를 흔히 생활과 밀착되었느니, 또는 일상적이고 평범함 속에 아름다움을 찾는
고산윤선도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상식적인 정보가 전부이다. 고산이 남긴 여러 작품과 후대에 연구된 업적들을 샅샅이 훑어 윤선도를 내 나름대로 해석해보겠다. 먼저, 그가 자주 접하며 하나의 기준이나 틀로서 그의 정신세계를 자극한 자연을 살펴본다. 고산의 사상적 배경을 아는 데나 저작을
(2) 고산윤선도 선생의 삶의 발자취
윤선도는 선조20년(1587년)에 태어나 광해군, 인조, 효종대를 거치고 현종12년(1671)에 돌아가셨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같은 유래 없는 변란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당쟁이 심해지는 가운데 서인이 득세한 시기였다. 그의 집안은 대를 이어 벼슬을 한
1. 서 론
조선 시대의 시가 문학사에 대표적인 작가로 고산윤선도를 빼 놓을수 없다. 일찍이 김수장 같은이는 「해동가요」에서 윤선도의 시가를 다음과 같이 평 하였을 정도다.
이 분의 노래하는 법은 속세를 벗어나 맑고 높아서 내가 그를 보면 마치 오를 수 없는 만장 (萬丈) 산봉우리 같이
고산윤선도의 <어부사시사>는 특히 가장 독자적인 우리의 어부가라고 할 수 있다.
Ⅱ. 어부사시사
1. 고산윤선도(尹善道)
1587(선조 20)~1671(현종 12). 조선 중기의 문신․시조 작가.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唯
윤선도의 생애에는 몇 가지 특이한 사항들이 발견되었다. 어린 시절 생부모(生父母)를 떠나 양부모(養父母) 밑에서 지낸 것, ≪소학(小學)≫을 중시한 것, <병진소(丙辰疏)>를 올려서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을 논박하다가 경원(慶源)으로 유배간 것, 인평대군(麟坪大君)과 봉림대군(鳳林大君)의 왕자
1.윤선도의 생애 (1587-1671)
윤선도는 17세기의 초에 활동한 문인이며 대표적인 시조시인이다. 그는 1587년(선조 20)에 한성의 연화방에서 출생하였고 자를 약이(約而), 호를 고산(孤山)․해옹(海翁) 이라 하였다.
그의 유년기에 있어 가장 중요한 전환점은 그가 8세 때 친부모의 곁을 떠나 숙부 관찰
고산문학의 국문학사상 위상 연구
고산은 윤유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나, 큰집에 손이 없어서 종손으로 양자를 갔다. 윤선도의 양부는 윤유기다. 지금 해남에는 해남 윤씨 종갓집과 그 유품들이 박물관에 잘 보관되어 있는데, 이곳이 윤선도의 본가이다.
그가 30세 때에 이이첨의 무리들이 광
2. 고산의 생애와 그의 시대
1)양란과 붕당의 격변기
앞서 말했듯이 윤선도는 17세기 전․중엽을 살다 간 인물이었다. 이 시기를 기념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은 임진왜란(1592)과 병자호란(1636)이다. 두 양란은 16세기 후반 이후 차츰 들어나기 시작하던 봉건체제의 틈새와 맞물려 조선을 전기와 후기